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구한말에서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한 인물의 삶을 다룬 역사소설로,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이 황제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의 기구한 인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작가 본인이 가진 지식을 십분 활용하여, 중국 고사와 한자를 수없이 섞은 독특한 문체로 적혀 있어, 망상에 빠진 사이비 교주의 삶의 기록이, 마치 초대 황제의 실록을 읽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인공인 황제는 1895년 충청도의 가난한 산골 계룡산 백석리(흰돌머리마을)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 '정처사'는 《정감록》의 예언(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왕이된다)과 신비한 거울을 이용해, 자신과 아들을 새로운 왕가의 후계자로 포장 합니다. 황제 또한 어려서 부터 대단히 총명하고 인품이 뛰어 났기에, 마을 사람들은 이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믿고 말죠. 아마 세상과 동떨어진 순박한 시골마을 이라서 가능했을 겁니다.
세상이 바뀌고 과학과 문명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음에도, 한적한 시골마을에 사는 주인공은, 시대와 동떨어진 학문, 제왕학을 배우며, 황제라는 세뇌를 당하며 자라나게 됩니다. 시작은 순진한 시골마을 사람들을 속여, 좀 편히 살아 보고자 했던 아버지 정처사의 거짓말 때문이었지만, 10대 시절 첫사랑에 실패한 황제가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깨어나면서 부터, 일은 크게 잘 못되기 시작합니다. 열병을 앓다가 어떤 계시를 듣게 된 황제는, 스스로 자신이 황제라고 굳게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1910년. 황제가 16살이 되던 해에, 이씨의 나라 조선이 정말로 망하고 맙니다. 이제 황제는 자신의 숙명을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황제로서 살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놀랍게도 그의 주변에는, 그를 황제로 믿는 충성스러운 인물들이 모여들지만, 이미 그들의 삶이 코미디로 끝날 것임은 누구나 예상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시대의 격변기 속에서, 황제의 삶은 비극적이면서도 블랙 코미디적인 상황들이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는 생전 처음 기차를 보고 크게 놀라 도망치기도 하고, 시골 주막에서는 주모에게 속아 자신이 가진 재산을 다 넘겨버리기도 합니다. 일본 헌병에게 자신이 아는 유일한 일본어 "바가야로"라고 외치며 접촉을 시도하다가 고초를 당하는 장면에서는, 왜 저러나 싶으면서도, 불쌍한 마음까지 들게 됩니다.
황제의 삶에서 가장 희극적이고 비극적인 순간은, 그가 마을 주변에서 '남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촉발된 개국 결심은 그의 과대망상과 허황된 꿈의 집대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황제는 '남조선'이라는 국호와 '신천'이라는 연호를 정해 말로만 존재하는 허구의 왕국을 세웁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그의 개국은 실상 마을 사람들에게조차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었죠.
하지만 대한민국 격동의 근현대사는 황제가 시골마을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순박한 망상에 빠져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일제가 물러가고 한국전쟁을 몸소 체험 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황제가 아님을, 일생 동안 믿어온 모든 것이 허상임을 어느정도 깨닫지만, 아직도 자신을 따르는 일부 충신들과, 그동안 믿어온 가치관 때문에, 신념을 모두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황제로써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그의 왕국 근처에서 놀다가 황제와 충돌하게 되면서 발생하는 사건을 볼 때쯤이면 황제에 대한 측은지심까지 느껴집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 된 채, 시대의 변화를 애써 거부하며 살아가는 황제의 모습이 젊은 세대에게 얼마나 터무니없게 비춰지는지.... 젊은이들은 황제가 멍청한 정신병자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끝까지 바뀐 세상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남조선국 태조, '백성제'로써 생을 마무리 합니다.
그리고 1970년. 계룡산에 취재를 위해 들어갔던 한 기자가 이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우연히 알게되면서, 그가 조사한 황제라는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고 기록 보존을 위해 적어 둠으로써 '황제를 위하여'라는 소설이 탄생하게 됩니다. 미련해 보이는 황제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흰돌머리마을 사람들은 황제의 저 정신병자 같은 망상을 받아주며 살아왔던 걸까...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세상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과 예언에 매달린 인물의 삶을 블랙코미디적으로 그려낸 대작입니다. 혹자는 이문열 인생일대의 역작이라고 까지 표현하죠. 1980년대에 나왔지만 오늘날까지도 계속 인기를 얻고 있는 스테디 셀러입니다.
어려운 한자의 남발, 수 많은 중국 고사의 인용, 그리고 고루한 문체로 인해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작품입니다. 특히 실록체로 과장되게 서술된 부분은 지금 시대 독자들의 취향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스타일이 오히려 소설의 매력을 배가시킨다고 느꼈습니다. 복잡한 한자어와 고사 인용이 작품의 무게감을 더하고, 과장된 실록체가 황제의 삶을 더욱 풍자적이고 아이러니하게 그려내는데 도움이 되었고, 저는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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